[17 Feb 2018] 논문준비, 피로, 그리고..

이번 주는 완전히 논문을 준비하는 데 매몰되어 시간을 보냈다. 시간적인 투입은 충분했으나 산출이 영 시원찮다. 시원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볼 품 없다.

논문은 논문대로 어떻게 '언젠가는' 잘 되어갈 것 같은 기분은 드는데, 가장 큰 문제는 요새 불안감이 너무나도 심각해서 잠을 잘 못잔다는 것이다. 이번주 일일 평균수면시간을 계산해보면, 아마 네 시간 남짓 될까 싶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규칙적으로 매일 네 시간 내외로 잔 것이 아니라, 긴장이 너무 심해서 잠이 안와 밤을 새고, 그 날 8시간 정도 자고, 그 날 또! 다시 밤을 새고를 정확히 세번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이틀은 운동을 세시간 정도는 했으니, 몸 상태가 영 아니다. 그래서일까 몸에 한 구석이 깨름직하게 아프다. 유사한 증상을 열심히 의학논문을 통해 찾아보니 처음에는 굉장히 심각한 질병과 증세가 비슷하고 평소 먹는 약과 어느정도 호르몬 상의 연관성이 있어 보여서 순간 패닉이었다.

아직 확정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질병이 지금 나의 상황에 더 있을 법 해 보여서, 일단은 내일 모레 병원에 가서 확인할 생각이다. 영국에 있는 동안 병원에 한 번도 가질 않았었는데, 결국 가는구나 싶어서 참 안타깝다. 제발 수술이 필요없는 것이길 간절히 바란다.

내일은 오전 중에 일어나서 운동을 살짝해보고, 유산소운동이 나 나름대로 추측하는 나의 질병에 좋다고 하니, 아주 오랜만에 런닝머신도 좀 해야겠다.




한국은 설날이란다. 설날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낸게 언젠지 기억은 안나지만, 설날하면 항상 생각나는 건 우리 아빠다. 그리고 어제 새벽에 통화를 해서인지, 지금 내가 해야될 일에 추동력이 된 기분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영국에 오기 전, 설날에 할머니 댁에서 아빠가 나에게 한 말은 잊기 어렵다. 엄밀히 말하면, 나에게 한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는 항상 잘해줬다. 그리고 아빠의 기분이 아직까지도 전혀 상상이 안되지만, 내가 미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전혀 기분좋게 허락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탐탁치 못하게, 마지못하게 허락하진 않았다. 그때도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믿어줬던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간다는 대학교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닌 학교는 어떤 면에서는 내가 목표한 곳보다 더 좋은 학교였지만, 아빠와 내가 구두로 계약한 내용에는 없었다. 아마 그것에 대한 실망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 이후로 아빠와 나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충 학교를 다니던 중에 맞은 설날이었다. 나는 방에 있었는데, 밖에서 아빠는 내가 싫다고 했다. 너무나 진지했고, 정말 실망스러운 어투였기때문에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어느정도 타협점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새로운 대학교에 다시 수능을 봐서 간다고 했고, 점수를 받았다. 아빠는 그저 '괜찮은' 직업을 갖길 바랬다. 그리고 내가 받은 점수는 그래도 그 '괜찮은' 직업 중 하나인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지방에 있는 치과대학에 도전해 볼만은 한 점수였다.

그렇게 지원을 했지만, 내가 받은 예비번호는 380번 즈음. 보통은 최종까지 150명까지 빠진다기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어짜피 수능점수도 내 평소실력보다는 월등하게 나왔기 때문에 크게 실망감은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모 대학교에도 지원했다. 내가 받은 예비번호는 12번, 작년이나 그 전에는 15에서 20번까지는 빠졌단다.

기대가 큰 걸 넘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냥 이미 명문대생이 된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 다만 실수는 아빠한테도 그렇게 말했다는 것. 뭐가 그렇게 꼬일려고 그랬는지 첫번째 추가 합격은 8명, 두번째는 2명, 세번째는 0명 그리고 계속 빠지질 않았다.

어짜피 한 명이 더 빠져봤자, 그래도 나는 떨어지는 상황이었지만, 서운했고 굉장히 박탈감이 컸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그랬겠지. 엄마를 통해 떨어졌다는 소식을 대신 전하고 아마 6개월 정도는 아빠를 피해다녔다.

그 때 나는, 다시 수능 볼 준비나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3-4월 정도 됐을까, 입학해도 4수생이 되는 나이니, 크게 한 방을 노리겠다는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을 하며 신림동으로 갔다.

너무나 기억이 생생하지만 신림동에서의 시간은 말 그대로 실패만 남은 인간쓰레기의 삶을 살았기에 쓰고 싶지도 않다.

뒤돌아보니 동기는 졸업을 했고, 군대간 애들은 제대를 했다. 나는 그저 실패의 연속으로 쌓인 자책감 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자책감이지만 아빠에게는 실망감이고 그 감정은 이제 나에대한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으니까.

어찌저찌 소박한 목적들을 달성해가면서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모든 걸 결정짓는 게 5개월도 채 남질 않았다는게 아마 내 불안감의 주된 요인일 것이다. 그 요인의 중심에는 아빠가 있다.

내가 지금 하는 공부는 정말이지 내가 세운 목표와, 나의 적성에 부합한다. 가끔 힘들고 어렵지만 최소한 재미는 있다. 빨리 집에가서 문제를 풀고 논문을 쓰고 싶을 때가 많고 이런 이유로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한 쪽에는 나에게 여태껏 투자 아닌 투자를 한 아빠에 대한 굉장히 무거운 채무감 또한 있다. 그 무게가 불편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들어내야하고 들어내지 못할 경우에 대한 생각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영국에서 맞이하는 설날, 한국에서 겪었던 그 설날, 생각해보니 나는 이 두 설날에 나는 아빠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