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76쪽)
이 책은 역사적 저작의 목적이 일화나 연대기 등 완결된 업적들의 연구를 토대로 설득하는 교육에 있지 않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시간순으로 관찰 및 기록되는 역사 속에서 설명되는 대상은 사실, 이론, 방법의 측면에서 특이한 것들이다. 이 특이한 것은 전승되어 가는 어떤 흐름에서 축적을 훼방해온 장애물이다. 그리고 역사는 그 장애의 연대사를 기록하는 분야가 돼버린다. 이러한 장애의 연대사에서 축적된 데이터는 곧 과학이 축적에 의해 발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시사점은 저자가 이 책에서 정면으로 도전하는 관점이다.
이를테면, 2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운동을 자연적 운동과 강제적 운동으로 구분해, 물체는 자신이 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성질, 예컨대 자유 낙하 운동은 땅으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본성, 그리고 물체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외부적 힘에 의해 가기 싫은 곳으로 움직이는 성질, 예컨대 날아가는 화살은 화살이 발사되면서 뒤에 생기는 진공을 ‘싫어하여’ 앞으로 이동하려는 본성, 등 이 두 가지의 운동 양상이 있음을 제시)은 현재 과학보다 덜 과학적이지 않다.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었다는 이유는 이론의 비과학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동시에 과학의 발전이 축적의 형태로 이뤄지지 않음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티븐 호킹의 이론은 모두 관찰과 증거를 통해 발견된 과학적 타당성을 지니지만, 전자에서 후자까지 축적을 통해 발전했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하긴 어렵다. 이 책은 기존의 통용되는 과학의 기준(정상과학, normal science)이 무언가에 의해 파괴되는 이상한 현상들을 더 이상 과학자 사회에서 회피할 수 없을 때를 집중한다. 이 책은 이때를 과학자 사회에서 비상적인(extraordinary) 탐구를 하는 시기로 본다. 이 비상적인 탐구를 통해 새로운 과학의 기준이 발생하는 것을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과학의 역사는 정상과학에서의 전통적 원리가 파괴되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리고 과학의 역사는 축적을 통한 발전이 아닌 분절적인 변환이다.
그 분절을 이 책에서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본다. 패러다임은 동사의 언어적 변환 구조를 뜻하는 단어다. 즉 기본형에서 변형된 형태의 단어는 기본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변형은 패러다임이 이미 제시한 현상과 이론을 재고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따라서 이미 제시된 패러다임적 현상과 이론은 영속성이 있고 이를 정상과학적 연구로 본다.
사실적 과학 탐구로서 정상과학적 연구는 세 가지 양상을 띤다. 첫째로, 패러다임이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사실을 특정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밝히는 것이다. 신기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종류의 사실을 재정립(=결정)하는 경우를 말한다. 둘째로, 패러다임 이론과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존재는 풀어야 할 문제를 설정한다. 마지막으로, 패러다임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양상이 혼합된 형태로, 패러다임 이론이 지닌 모호함을 제거함으로써 이론의 정련을 이뤄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양상은 정상과학의 목표가 실질적인 혁신이 아님(즉, 흥미롭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으로 예측됨)을 말한다. 그런데도 과학적 안건이 다뤄지는 것은 과학자 사회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자에게는 적어도 정규적인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의 탁월성이나 기술을 시험하는 문제들의 범주를 퍼즐(puzzle)이라고 할 때, 과학자는 퍼즐 풀이자(puzzle-solver)다. 퍼즐의 결과가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것이냐 또는 중요하냐 하는 것은 퍼즐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아니다. 퍼즐이 결국 풀어지느냐의 문제에서 과학자는 퍼즐을 풀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이 퍼즐을 푸는 유일한 결과는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조각을 다 써야 한다든지, 그림 없는 쪽은 바닥에 가야 한다든지 등 일종의 규칙에 따라 완성이 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만족하기 전까지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닌 것으로 본다. 이 책은 이와 관련해 공유된 패러다임을 공유된 규칙, 가정, 견해로 보는 것이 아닌 정상과학 전통의 일관성의 원천으로 소개한다.